에이징 솔로

🔖 작가 캐럴라인 냅이 「명랑한 은둔자」에 쓴 것처럼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 즐길 때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기 때문이다. 남지원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혼자인 것을 즐기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 세계에 소속돼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 그는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라서 생존을 위해서는 친밀감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수렵 채집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살아남으려면 이웃이 사냥하러 갈 때 나한테 같이 가자고 이야기할 사이가 돼야 하고, 사냥해 온 걸 같이 나눠 먹는 사이가 돼야 해요. 이런 게 전부 미래의 생존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요. 그래서 친밀감이 생존에 필수적인 거죠. 그 친밀감은 상대가 누가 됐든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혼인 관계가 친밀감을 독점하지는 않죠. 결혼은 낭만적 관계라기보다 정서적 친밀감과 성•자녀•경제가 모두 연루된, 삶이라고 하는 비즈니스의 파트너 관계예요. 동업자 같은 관계인데 끝까지 좋게 가기도 쉽지 않아요. 포유류가 젊었을 때 만나서 3~4년 지나면 로맨틱한 감정이 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비혼이 친밀감에 대한 욕망을 충족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건 오해죠. 인간의 관계는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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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징 솔로가 친밀감을 추구하는 방식은 "식욕이 사람마다 다르듯" 저마다 달랐다. 원가족과 긴밀한 사람도 있고, 친구, 공동체, 스스로 만든 모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구성하며 친밀감을 충족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며 살아간다. 솔로도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 관계를 원치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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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보다 각기 다른 친밀한 관계를 여럿 갖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더 높여준다는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있다. 슬퍼서 위로가 필요할 때, 행복한 일을 같이 나누고 싶을 때, 불안을 누그러뜨려야 할 때 등등 서로 다른 감정을 나눌 각각의 관계를 여러 개 가진 사람이 그 모든 감정을 아주 가까운 소수의 관계에서만 나누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특정한 감정을 다룰 특정한 관계를 그냥 관계(relationships) 대신 감정 관계(emotionships)라 불렀는데, 그런 감정 관계의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는 것이 삶의 질을 더 높여준다고 했다.

🔖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공동 저자 이지은은 오랫동안 치매 돌봄의 현장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발견을 소개하며 "자아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치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전의 삶의 흔적들을 가진 몸의 사소한 행동들이 사실은 그 사람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의 몸은 그저 손상된 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는 미국의 인류학자 저넬 테일러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겪으며 깨달은 통찰이 실려 있다. 딸을 알아보지 못해도 친근한 방문객으로 맞이하고 체화된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는 어머니를 대하며 테일러는 "앞뒤가 맞지 않지만 어떻게든 이어지는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대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의사소통'이 아니라 서로 말을 '주고받는' 제스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누군가를 하나의 인격 혹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지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과 내가 주고받는 제스처들에 대해 내가 기울이는 관심, 무의미해 보이는 그 사람의 몸짓들이 의미를 갖게 하는 관계와 돌봄의 제스처"라고 말한다.
존엄은 그렇게 이어지는 삶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이전과 같은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졌지만 서로 어긋나는 문답으로라도, 끄덕이는 고갯짓이나 눈빛, 손을 잡고 살짝 힘을 주는 것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 아버지의 혼란에 맞추어 반응하고 뜬금없는 '아무 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아버지와 함께 웃거나 슬퍼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 상호작용이 아버지의 현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게 아닐까.

🔖 그야말로 엄청난 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혼자 살 기를 선택하는 사람이 계속 증가하고, 취약한 사람을 가족이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현실에서 복지의 기본 단위를 가족에서 개인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한국 사회에서도 검토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사회학자 오치아이 에미코가 「21세기 가족에게」에서 말한 것처럼, "이미 모든 사람이 속하는 사회적 단위가 없다고 한다면, 사회의 기초 단위가 되는 것은 개인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그렇다. 이제는 다른 상상이 필요한 때다.
사회보장의 혜택이 개인 단위로 제공된다면, 가족은 구성원의 복지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중압감에서 놓여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녀의 대학교 진학 때문에 경제적 부담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해방될 것이다. 결혼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친밀한 사람과 가족을 이루려는 시도도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일는지도 모른다.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한 구체적 경로도 아직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양을 만들고 지원하는 것이 제도라면, 삶의 변화와 필요에 따라 달라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가족이 짐을 덜어 유연해지고, 흑백논리처럼 결혼 아니면 솔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든 둘이 살든 아니면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든,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다양한 방식으로 맺은 친밀한 관계가 제도적으로 인정받고 서로 돌볼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미래 가족의 모습이 되는 걸 보고 싶다.